#침묵의 인격 살해자
엄마는 오늘도 늦게까지 일터에서 돌아오질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냉장고를 향한다.
살풍경한 집이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없다.
아빠의 얼굴을 직접 본 지도 오래되었다.
매일 회사와 집을 오가기는 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칠 일이 없다.
뭐, 워낙 바쁘시니까.
난 혼자일 때 무적이 된다.
내 맘대로 집안을 진두지휘 한다.
소파 위치도 바꿔보고, 믹서기로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을 다 갈아버리기도 하고.
걸레는 아무 곳에나 널어두기.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완전한 내 세상.
내 말을 거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하는 행동에 이유를 붙여야만 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그 날은 체육시간이라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체육복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는 교실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어버릴까. 확.
언제까지 이런 의미없는 생활을 반복해야 하지.
물어봐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려야 하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교실에 줄넘기를 두고 갔는지
녀석이 교실로 들어왔다.
걷어진 팔목과 커터칼을 보고는 뛰쳐와서 참견을 해 대는 것이다.
"윤재영, 왜 그래. 너 미쳤어?"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세상이지."
내 내꾸에도 아랑곳없이 내 볼을 잡고 앞뒤로 세게 흔들어대는 바람에
어지러웠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흔들거렸다.
그 날부터 신경쓰이는 녀석이 생겼다.
어느샌가 녀석의 모습만 찾고 있는 나를.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는 얼굴을.
잊을 수가 없지.
하지만 녀석이 부럽다고 말할 수는 절대 없어.
녀석의 모든걸 빼앗아서 밑바닥에 엎드려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나의 비뚤어진 애정의 화살이 우리 사이를 가를 때.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윤재영! 뭐 때문에 이렇게 까지 해야 해? 내가 말라 죽는 거 보고 싶어?"
이야기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는 나를 된장녀라고 불렀었다.
나는 네게 된장녀라는 또다른 각인을 씌우고 싶어 했다.
너한테서 된장 냄새 난다고.
코를 찌르는 된장 냄새.
사실 내가 몰래 발라 두었다. 녀석의 교복 엉덩이에.
그것도 모르고 체육복을 훌훌 벗더니 교복으로 갈아입고는 아무렇지 않게
엎드려 있다.
어쩌면 너무 당당해서 나는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야, 어디서 된장냄새 나지 않냐?"
"온지 주변에서 나는 것 같은데."
그 날 이후로 녀석의 별명은 정말 된장녀가 되었다.
놀려대기 좋아하는 녀석들이 붙이는 별명이란 게 다 그런거지.
감히 나한테 된장녀라고 지적질을 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너도 나 땜에 아파봐야지.
비오는 날만 되면 별명은 된장녀에서 된장국으로 바뀐다.
이미 더러워진 온지의 교복은 다시 깨끗하게 되었지만
온지의 마음까지 깨끗해졌을리는 없다.
그 뒤로도 나는 녀석이 우는 모습이 보고 싶을뿐.
그러나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녀석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반 아이들 전체를 상대로
나에게 싸움을 건 것이나 다름없다.
애나라는 별 거지같은 게 붙어있기는 하지만
미친년은 예외로 두자.
그날이 네가 나에게 말을 건넨 마지막 날.
그 뒤로는 나를 쓰레기처럼 피해다니고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게 되었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책상 정리를 하곤 한다.
쌓여있는 책들의 방향을 맞추고
책상에 놓인 펜 머리 방향을 맞추고
지우개와 샤프의 위치를 정해놓는다.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참을 수 없다.
어제도 지나가던 같은 반 녀석이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시비가 붙어서
손바닥이 조금 쓰라리다.
얼마쯤 갈겼을까?
적어도 다섯대 이상이었던 것 같다.
두 뺨이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때렸으니까.
너는 또다른 온지다. 내게 거역하는 나쁜 기집애다.
내 세계를 무너뜨리는 모든 인간은 민온지와 똑같이 해줄 거야.
미안하게도 나는 너희들 보다 훨씬 똑똑하거든.
선생님도 건드리지 못하는 게 바로 이 윤재영이다, 이거야.
이럴 땐 쓸모 없는 것 같은 부모님 덕 좀 보는 것 같다.
따뜻한 도시락 한 번 싸준 적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우리 재영이.
그 입술을 잡아 뜯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 마음이 치밀 때마다 나는 계획적으로 민온지를 찾아가 괴롭힌다.
너는 알고 있을까.
내 죽음을 뜯어 말린 네가 나 때문에 말라 죽어가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 비뚤어진 사랑의 끝에서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것들이 사랑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버린 나의 요동치는 마음을.
사랑......사랑이 뭐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 갖고 싶다.
한편으로는 모든 걸 부숴버리고 싶다.
가질 수 없다면 깨뜨려 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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