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을 잘 하지 않는 뽀야.
우연히 잘못 눌려서 친구들의 상태메시지를
주욱 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새롭게 눈에 뜨인 것은 아빠의 상태메시지.
그리고 프로필 사진.
전부 가족사진이었다.
뽀야는 보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혼났다.
이미 아빠의 부재를 알고 있음에도
그걸 눈으로 확인해버리니까 눈물이 나더라.
있다가 없으면 정말 가슴 아프다는 거.
그리고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고귀한 존재라는 것.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중에 하나이다.
카톡에 있는 가족사진을 찍게 된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날에 전주에 놀러가서
길가에 얼음이 늘어서 있고 하는 더운 와중에
그냥 발길 따라 들르게 된 사진관.
뽀야는 그저 색다른 한복을 입은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가족사진까지 찍게 된 것이다.
이 사진이 정식으로 사진관에서 찍은
타지에서의 아빠와의 마지막 추억이 될 줄이야.
하필이면 또 흑백사진이다.
그 때도 가족사진을 찍으면서
흑백은 좀 그렇지 않나...?
싶었는데 어느새 컬러감이 풍부한 우리 가족에게
아빠 모습만 검게 처리되는 그런 사태가 올줄 몰랐다.
그 때가 2018년이니까 정말 몰랐지.
사실 아빠는 조금씩 몸이 안좋아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나와서 걷기가 힘이 들고
얼굴에 보기좋게 살이 붙고
팔다리가 자주 붓고
처음에는 얼굴에 살이 붙는 게 좋은 영향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자주 부었던 것 같다.
혈액순환 같은 게 잘 안돼서 그랬던 것도 같고.
뭐 평소에 워낙 많이 드셔서 그래서 비만이 살짝
온 걸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빠는 항상 한뼘 넘는 거리에서 우리를 쫒아왔다.
더운 여름에 지친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전주라는 곳에 굳이 와서 자신을 고생시키는
딸내미를 바라보며
힘들긴 해도 쟤가 웃는 모습이 내 몫이니까.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다니셨던 것 같다.
뽀야는 당시 하이텐션으로 정줄을 놓았던 것 같다.
전동성당도 아름답고 거기서 찍는 사진은 특별했다.
마침 한복이 금색과 흰색, 푸른색이였어서
땡볕이 내리쬐는 파아란 하늘 아래
제 몸뚱이보다 둥그런 치맛자락을 질질 끌면서.
땀으로 범벅 된 얼굴을 하고 열심히 사진 찍어주던 아빠.
그 땐 고마움을 몰랐네.
자꾸 쉬었다가 가자며 온갖 특이한 음료수.
특이한 과자 가게에서 멈춰서던 아빠의 모습.
덥다는 말은 별로 꺼내지도 않으셨다.
다만 땀이 자꾸 날 뿐이었지.
뽀야 기분 맞춰주시느라 하루 종일 엄청 고생했던 그날의 전주.
끼니라도 제대로 전주의 맛을 느꼈다면 좋았을 텐데.
전주하면 비빔밥인데 아빠도 밥을 먹기를 원했고.
그러나 우리의 당시 위치는 밥집과 상당한 거리.
그냥 가까운 떡갈비집에 들어갔다.
비좁은 가게 안 다닥다닥 붙은 식탁.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넣고
에어컨도 잘 안되는지 후텁지근한 그 곳에서
끼니를 때웠다.
여행을 갈 거였으면 제대로 조사를 해보고 나올 걸.
뽀야가 조사한 데이터는 하나도 맞질 않았었다.
있어야 할 곳에 가게가 없다든지.
위치가 전혀 다르다든지. 하는 일이 반복되어서.
우리는 서서히 지쳐갔고
식도락 여행을 만끽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우니까 어디든 빨리 들어가서 배 채우자.
이런 느낌이었으니까.
엄마와 아빠와 동생이 많이 투덜댔었다.
전주까지 와서 국물도 없는 뻑뻑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흔한 떡갈비라니.
조금만 옆에 갔으면 육회비빔밥집이 있었는데.
초조해진 뽀야가 아무가게나 들어가자고 외치는 통에
이런 사달이 나버렸다.
어쩌면 이번 전주여행의 주체는 뽀야이고
전주여행에 대해 아무런 사전 데이터를 가지지 못했다.
아빠는 여행을 가도 식도락하고는 거리가 먼 일정을 잡기로 유명하고.
먹는 게 반인데.
아마도 장시간 운전을 하느라 진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전주여행은 흑역사가 될 뻔하였으나
이번에 병원에 가져가서 붙여놓을 아빠사진을 찾다가
훌륭한 가족사진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코팅하기까지.
정말 다행이었다.
심지어 전주 가족사진 속 아빠는 환하게 웃고 계시다.
사진사 아저씨가 던지는 농에 열심히 호응했었거든.
그래 이걸로 된거다. 하면서 뽀야는 과거의 나를 칭찬해주기로 했다.
가족들이 정말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면
지금이라도 좋으니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을 기록하세요.
라고 하고 싶으나 지금은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까.
이렇게 계속 집의 반경에 있는 생활에 염증이 나기도 한다.
집단감염이 계속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외로워져야만 한다.
랜선으로 휴대폰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 만나서 느끼는 감촉이나 애정의 전달.
기계는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상통화 같은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빠의 마지막 통화는 동생이었다.
그게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 전화가 걸려온 게 뽀야 휴대폰이었고
아빠랑 엄마가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신 순간에
수화기를 귀에 대 드린 것도 뽀야였으니.
아빠 멀쩡할 때 동생 괜찮은 거 다 확인하시고
짤막하게 안부도 묻고 했으니 정말 다행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쩜 그렇게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들어맞는지.
아빠 간병하면서 많이 느꼈었다.
허투루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좀더 촉을 세워서 면밀하게 일상을 재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작은 신호라도 놓치지 않기를.
그래서 오늘도 운동을 하고 초석잠차를 마시고
간간이 공부도 하면서
주변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이 늘어가고 있다.
내가 보는 하늘이 사각형 프레임에 갇혀버린 답답한 푸른빛이라도
나는 너를 계속 바라보련다.
너도 나처럼 생동하며 항상 변화하니까.
지금 보는 이 모양의 하늘을 다시는 돌려 볼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렇게 소중한 매일을 살아가는 당신이 정말 아름답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내 곁에 아빠가 계시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나는 살아가야 한다.
아빠와의 추억은 짐이 되지 않고
내 엉덩이를 두들겨 주는 격려가 된다.
눈물이 자꾸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매일 저녁에 나는 뚫어져라 아빠 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대개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끝나는 그 인사를 이 순간을
아무리 바빠도 잃고 싶지가 않다.
매일 자는 시간만 꿈꾸는 잠꾸러기 뽀야 곁에
아빠는 영원히 부재중이다.
아빠 사랑까지 박제된 것 같아서
들춰보면 자꾸 눈물이 나지만
그 눈물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오늘 더 많이 사랑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