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가 에드워드가 되어가는 과정
이 책을 고르게 된 건. 정말 충동이었다.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한 아이. 라는 광고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소설이라는 건 구매하고 나서야 알게 될 정도로 세심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런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좋은 책이었다.
책 속에 나왔던 내게 의미있던 부분을 찾아보면 이러하다.
[에드워드는 다시 에디로 돌아갈 수 없을 것.]
이 말은 비행기 사고 전에 수줍고 귀여운 소년 에디였던 그는
비행기 사고 후에 성장해버려 다시 에디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리운 가족들이 불러주던 귀여운 애칭을 다시금 따스하게 불러 줄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쉐이라는 친구가 곁에 있지만. 친구가 가족을 대신할 수 없을 때도 있는 것처럼.
[쉐이라는 여자아이와 밤을 공유하는 허한 느낌.]
이 부분에서는 쉐이가 에드워드를 망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쉐이가 있어야지만 에드워드가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이고.
쉐이에게도 동지가 필요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이 두 콤비는 정말 죽이 잘 맞고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간다.
나와 비밀을 공유하는 특별한 존재. 그런 친구가 하나쯤 있으면
정말 좋은 인생을 산 거라고.
그러고 보니 내게도 그런 지인이 있었네.
비록 현실 삶에 치여서 자주 연락하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톡을 날려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그런 인연을 놓치지 말고 소중히 여기고 싶다.
[푸가 상태. 의식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는 경험.
트라우마 희생자들에게 흔한 증세.]
에드워드는 푸가 상태에 빠지고 싶어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 또한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휙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이 말이 기억에 남았나보다.
사실 우리 삶 속에서 이 푸가 상태가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큰 충격 이후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주 재밌는 글/만화/영상에 푹 빠지거나 깊은 감명을 받아서
정신 못차릴 때 주로 나타난다.
시험공부에 열을 올리다가 하얗게 재가 되었을 때도 이런 경험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특별한 점을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해.
네가 특별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지.]
에드워드는 끔찍한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한 명의 생존자.
그 자신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운처럼 다시 주어진 귀중한 생명이었다.
처음에 이모네 가족은 그렇게 힘들게 살아남은 에드워드가 잘못될까 봐.
사소한 에드워드의 행동에도 크게 걱정하고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했을 걸.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쉐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에디가 성장할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 사람과의 교류는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이 책이 독특했던 점은.
사고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와 사고 이후 에드워드의 삶이 겹쳐지는 전개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만약 엇갈리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소설이 좀 지루해지거나 재미없어질 수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상태를 [생존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 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만 하던 사고 이후 에드워드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쉐이와의 미묘한 관계도.
[우리 사이의 허공은 빈 공간이 아닙니다]라고 열심히 말하던 과학 선생님의 말씀도.
에드워드에게는 잔상이 되어 머릿속에 남는다.
글쎄, 과학이 발달하면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도 측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였는데.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가는 눈빛과 사랑스러운 감정.
이런 것들을 측정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서로 사랑의 형태를 재어보려 아등바등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감사의 말이라고 하여
작가가 어떻게 이 소설을 착안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
이 소설은 두 건의 실제 항공기 사고에서 나온 것이며.
각각 2010년 아프리키야 항공 771편의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9살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와
에어 프랑스 447편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만들어 졌다.
처음에 이 책을 구매하기 전에는
이게 실제 이야기인 줄 알고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런 착각이 들게끔 한 소설이니 내 기대를 책임져라!!
라고 말하고 싶어하며 완독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대만족이다.
에드워드가 쉐이랑 행복하게 되었으니 되었지 뭐야.
결국 모든 것의 원점이자 마무리는 사랑이라는 것.
거의 대부분의 소설 책들이 위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건 잘 알고있었으나.
이 책 또한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할 줄은 몰랐네.
설마설마 하면서 봤지.
그래도 모처럼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고.
책은 작고 귀엽고 가벼우며 사각사각 책 넘기는 맛이 좋다.
독서대가 있어서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독서대가 없었다면 나는 잔뜩 굽은 목을 해가지고
자세 다 버려가며 책에 몰두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주어진 책은 2권이다.
[돈의 속성]과 [질서 너머] 어느것을 먼저 읽을까나 고민하던 나는
[질서 너머]를 선택했다. 이는 조던 B 피터슨의 신작인데.
길햐라는 나의 소중한 친구가 소개한 작가의 책이다.
이 시대의 멘토인 그에게 배우는 인생의 법칙이란 뭘까.
귀가 솔깃솔깃 근질근질 하다.
내가 에드워드의 깊은 고뇌와 고민, 갈등 이런걸 대신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곁에서 같이 지켜보고 아파해주고 보듬어주고 그런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처받은 이 곁에서 버틴다는 건. 말 그대로 [버텨야]하는 것이고.
그것 또한 새로운 방식의 생존법이 된다.
에드워드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내 동생 같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허나 서양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 성장이 매우 빠르니까.
아마 18세가 되었다면 어쩌면 나보다 더 크고 우람한 체격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에드워드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모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화창한 봄날에 이걸 다 읽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읽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 보니
구름 낀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상처를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건 혼자서도 가능할 거라고 독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덩이에 빠지면 절대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사다리를 내려주거나 손을 뻗어줄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배우고 또 배워가면서 느낀 점은.
절대 사람은 혼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감성에 젖어 홀로 있는 순간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역시 누군가의 희생을 밟고 선 자리가 될 것이다.
먼저 손을 뻗어 보자.
그리고 따뜻하게 마주보자.
그런 기분이 벅차올랐다.
고마워 에드워드, 안녕.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0) | 2021.06.12 |
---|---|
선택 (0) | 2021.06.08 |
스스로 치유하는 뇌 (0) | 2021.03.09 |
나는 조지아의 미친 고양이 (0) | 2021.01.17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0) | 2020.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