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가는 길에 마주한 황금빛 옷 입은 나무.
약간 나선형 구조인게 멋있었는데
사진이 잘 안나왔네.
어딜 가든지 조금 특이하거나 눈길을 끄는 꽃나무가 있으면
꼭 사진을 찍는 편이다.
이파리가 금빛이 되어서 더 아름답다.
어떻게 자연에서 저런 색이 나올 수 있는지.
너무 신기하고 아름답고.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서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물과 조금의 산소만으로 저렇게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구나.
나는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인데......(흙)
나무를 바라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세월의 모진 비바람 다 맞고서
저렇게 꿋꿋하게 서있을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뽀야는 조금만 과로해도 빨리 누워줘야 하는데(?)
나무가 누워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갈대같은 풀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서 옛 사람들은 대쪽같은 나무들을 보며
자신을 질책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무가 가엽다.
혼자 모든 걸 묵묵히 견뎌야 하는 상황이.
물론 선택된 식물들은 혹여 죽지는 않을까
영양이 부족하지는 않은가
이런 저런 보살핌 속에 살아가는 식물들은 그만큼
복받은 일이지.
그런데 저렇게 밖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보자면
물론 관리인이 있어서 잘 돌봐주겠지만
1:1 돌봄도 아니고 24시간 돌봄도 아닐 테니까.
내 주제에 나무를 보고 처량하다고 여기는 것은
나무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감정이입은 한계가 없으니까.
무심코 보고 있자면, 아니면 뚫어지게 보고 있자면
가슴이 조금 아프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나서이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옷에 스치면
아빠 손길인 것 마냥 생각하고.
새들이 나를 향해 다가와 지저귀면
아빠가 뭔가 얘기하고 싶구나 하고 생각하고
저기 앞에 처음보는 개가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가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자연에 아빠의 손길이 스며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름 때는 정말 희한한 울음소리를 가진 새의 울부짖음이
그렇게나 귓가에 오래 머물렀다.
너무 서글피 울어서 도대체 무슨 새인지 알아보려고
찾은 결과는 문상 비둘기였다.
그래, 생명이 있으면 그걸 뒤집으면 죽음인 것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루하루 촛농을 떨구며 죽어가는 촛불과도 같다.
언젠가는 하얀 재가 되리라.
어떤 의도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의도는 만들어갈 수 있다.
오늘도 내가 그저 예쁘게 살아왔는지
그런 겉모습에 얽매이지 말고
깊이 있게 속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무를 보면, 나무를 보면,
죽어있던 내 감각들이 살아난다.
연민 스위치가 켜지고 끝도 없는 애정이 샘솟는다.
나무는 늘 그곳에 있을 것이지만
자신의 분신을 멀리 멀리 휘날리며 여행하는
나무의 모습이 가만히 살아가는 나보다
더 많은 걸 경험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코로나19로 인해 나돌아 다닐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랜선으로 여행하는 법이 있다고는 해도
완벽하게 내가 직접 가보는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뭔가 조금 부족하다고 그렇게 느끼는 걸 보니
아직 인간성은 살아있다.
비대면이 마냥 좋은 그런 철없는 어른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어여 거리두기가 완화되는 상황이 찾아와서
조금 멀리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또다른 모험이 뽀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야 하다니.
뭐,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개개인의 자유이고
같은 시간이라도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시간의 질이 달라지겠지.
공부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젊음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책보는 걸 늦출 수는 없다.
왜 하필 이런 생각이 지금 드는 건지.
심란하도다.......(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