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가 있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에도 고민거리가 있다.
필터가 과연 잘 작동할지.
필터교체는 얼마나 자주 해야 할지.
고장 나지는 않는지.
세균과 먼지 청소는 어떡할지.
그래서 겨울에는 물을 끓여 먹어도 보고.
그러나 저장공간이 없다.
김치냉장고는 이미 8:45.
여름에는 두고 먹을 곳이 없어서 물이 쉬어 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보리차의 구수한 맛은 정말 잃기 어려운데.
여차저차 하여 안전한 생수를 마시게 된 것이다.
아빠는 그 중에서도 삼다수를 골랐다.
제일 비싸면 좋은 줄 알았던 마음 80%.
앱 무료 배송이 있어서 편리함 15%.
생수 포장재가 짱짱해서 믿음이 감 5%.
하지만 비극의 시작이었다.
물은 우리 생활의 필수이다.
엄청 먹어댈수록 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양이 어마어마.
매일 발로 밟아서 부숴대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분리수거의 70%가 페트병이라니.
너무 무겁잖아.
팔 떨어질 것 같쟈나.
브리타 정수기라고 해서 쁘띠 정수기가 있긴 한데
그것도 물맛이 좀 애매 하다고 하니.
또 정수량도 적고 이래 저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산소 안 사먹는 게 어디야~ 하고
초긍정모드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런 미래는 생각하기도 싫다.
거의 한달에 6개들이 8팩을 먹고 있는 듯하다.
배송 아저씨한테 미안한 마음이 모락모락.
하긴 끌차한테 많이 미안하지.
집앞까지 배송 되어도 다시 집안으로 들여놓는 것도 일이다.
김치냉장고를 빨리 소생 시키든지 뭐라도 해 봐야
다시 보리차의 보들보들함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매일 뭐가 그렇게 바쁜지
서로 문 쾅 닫고 말도 한 마디 안 하고
자기 할일에 바빠서 그러고 산다.
그런데 왜 김치냉장고는 오래 묵으면 기상한 기계음같은 것이
소음처럼 그렇게 나는 걸까.
묵은지는 아무 말이 없는데.
왜 보관하는 네가 요란하니?
도무지 전원을 켜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저녁에 소음이 심해서 결국 격리해 둔 김치냉장고.
오래된 모델이긴 하다.
요즘에 누가 뚜껑 여는 식 김치냉장고 쓰나.
양문형 김치냉장고 쓰겠지.
끙끙 앓던 김치냉장고 곁에서.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비루한 문과녀는
너를 고칠 수는 없고 너를 위해 한 줄의 시를 적어본다.
[덜컹덜컹. 꾸직꾸직. 하는 너를 뒤로 한 채
휙 하고 코드를 뽑아 본다. 너는 말이 없다.
잘가라는 인사 한번 하지 못했네.
뚜껑한번 살살 닫아준 적이 없었네.
밀쳐내고 구겨넣었던 지난날의 나를
너는 매콤함을 누그러뜨려줌으로써 대답했지.
숙성이라는 마법을 다룰줄 아는 녀석아.
내 기분도 숙성시켜 주렴.
구수하고 부드럽게.]
아. 쓰고 보니 한줄이 아니잖아?!
조만간 김치냉장고 수리를 하든 뭘 하든 해야하는데.
뭐라고요?
냅두라고요?
아이고.(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