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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나요

아빠가 사준 수면양말

by 뽀야뽀야 2020.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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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는 것에 대하여.

까슬까슬한 아빠의 손등.

원형탈모가 진행중인 흰머리.

언젠가 뚜껑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태한 머리숱.

부리부리한 눈.

나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

조금 처져서 애틋한 눈매.

높으면서 잘 자리잡은 코.

뽀야 앞에서 헤실헤실하는 입.

살짝 앞으로 튀어나온 구강구조.

넓은 어깨.

몸에 비해 가는 팔다리.

불룩하니 튀어나온 심슨 배.

발등에 들어앉은 엄청 긴 털.

수도없이 많다.

보이지 않는 그 마음까지.

 

어제 문득 기모양말을 신고 있는데도

발이 시려서 수면양말이 어디있나 하고

뒤지다 보니 발견한 아빠표 수면양말.

이거 두 켤레를 사들고 와서 

아빠와 딸은 데칼코마니처럼 신고 다녔었다.

몽글몽글 양털 수면 양말.

분명 어딘가에서 안쓰러워 보이는 할머니 한테서 

샀겠지.

아빠는 그런 분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상추를 팔면 다 사주고.

물건을 늘어놓고 팔면 뭐 하나라도 집어가 주고.

뻥튀기 몇 개 집어오는 건 예사였지.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

늘 손에 대롱대롱 매다렸던 검은 비닐봉지.

거기서 뭐가 튀어나올까 궁금했었다.

비록 아빠의 귀가가 늦어 그 속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였더라도.

이제는 우리집에 돌아와도 그 때만큼은 따스하지 않다.

심적으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거실에 난방을 꺼놨기 때문에.

아빠는 훈훈한 집안을 지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추워지려하면 기침이 자주 났었고

찬데서 자면 몸이 찌뿌듯하다는 이유로.

집안은 정말 훈훈했었다.

게다가 안방에 장수돌침대까지 매일 가동하니 

안방은 그야말로 뜨끈뜨끈 극락이었지.

지금의 우리는 관리비 절약의 차원에서 

안방 제외한 방에만 난방을 넣고 있다.

코끝이 살짝 시리지만 원래 조금 쌀쌀하게 지내는 게

건강에도 면역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빠 본인도 조금 쌀쌀하게 지내는 게 좋다는 데 동의했었다.

본인은 실천하지 못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난닝구만 입고 있으려면 따뜻해야 했으니까.

나중에는 현실과 타협하여 난닝구에 수면바지.

그러고 거실에 앉아 열심히 과일을 깎으시던 모습이

내게는 더욱이 선명하다.

사실 이 수면양말 자체는 조금 불편하다.

시중 양말보다 사이즈가 배로 커서

신발을 신을수도없고  옷을 입기도 불편하다.

그럼에도 방 한구석에 오롯이 놓여있었던 건.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이었겠지.

늘 방안에서만 생활하는 뽀야를 위한 아빠의 선물.

어제도 덕분에 후끈후끈하게 푹 잘잤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빠의 흔적이 남아있다.

떠나간 사람을 빨리 잊어야 산 사람은 산다던 그 말이

조금 밉다.

불단은 아니고 방안에 조그마한 공간에 가족사진 걸어두고

거기를 지날 때 마다 마음속으로 아빠께 이런 저런 얘기를 건넨다.

잊는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프지 않을까.

그래도 함께 한 날들이 얼마인데.

내가 애쓰지 않아도 조금씩 잊혀져 갈 텐데.

지금은 그냥 마음껏 얘기하고 추억하고 싶다.

이제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걱정이 없다.

예전에야 아빠 운행에 방해될까봐 걱정 많이 했었지만.

걱정이라는 거.

정말 세상 쓸데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을 그런 사건에 대해 

앞서나가는 마음.

조금씩 마음을 온전한 곳에 쓰는 법을 배워간다.

하드디스크 정리하는 것처럼 마음 공간을 정리한다.

쓸데없는 의심과 불안, 걱정을 비워내 버리고

그 안에 만족과 감사 사랑을 채워넣고 싶다.

 

어제부터 영어 라디오 기록을 하려고 마음먹고 준비했었는데

부랴부랴 준비해봤자 FM라디오와 외국어 라디오를 혼동해서

시간을 놓쳐버리고.......

다음 방송은 오후11시라는 홈페이지 편성표를 보고 뜨악하여.

본인이 분명 그거 헷갈리지 말라고 써놔놓고 실수 반복.

아, 어제 7시까지 애태운 내 가슴은 어찌할꼬.

이래서 허당미는 숨길 수가 없다고.

그래도 다시 영어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솟아나서 참 다행이다.

항상 공부로 도피할 생각하는 뽀야에게

현실과 마주하고 새로운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짐이면서도 재미이기도 하고.

초콜릿이 달콤하긴 하지만 씁쓸하듯이.

약간 그런 느낌이다.

 

오전에는 동생이 할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워서

안그래도 고요한 거실의 적막에 

키보드 소리를 툭툭 던지는 뽀야는 

오늘도 맑음.

아빠가 사준 양말을 신고 있다면

나는 천하무적.

추위도 쓸쓸함도 훠이훠이 물럿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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