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보면 섬찟할 수도 있는 술병.
이것은 동생 친구가 아빠에게 선물한 안동소주이다.
아빠는 좋은 술을 받아도
모셔놓는 걸 더 선호해서
아니면 좋은 술자리가 그간 없었던 모양인지.
이 술을 남겨두었다.
이제는 뭐 마실 사람도 없다.
엄마는 이제 술이 싫다고 말하고.
동생은 술 마시면 홍익인간으로 진화해서 싫다고 하고
뽀야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술을 한 방울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우리에게 이 술이 가지는 의미는..?
엄청 독한 술인데 좋은 손님이 과연 우리집에 올까...?
코로나를 뚫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선물하기에는 원 선물자에게
너무 미안하므로 패스하고.
이런 저런 추억의 술병.
해맑게 웃고 있는 술병에 조각된 미소가 아름답다.
어제 머리를 감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학사모.
아빠한테 씌워드릴걸 하고.
물론 그당시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뽀야가 너무 졸업식장에 늦게 가는 바람에
그것도 안가려다가 간 거여서 헐레벌떡 가는 바람에
학사모도 미리 확보하지 못해서
친구 학사모를 빌려서 강단에 섰다.
사진도 아빠가 전문 사진사님께 부탁 겨우 해서
졸업 사진이 남아있는 것이지.
아빠의 재치가 없었다면 그냥 졸업식은 흑역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때 조금 미리 가서 학사모랑 가운도 구해놓고
차분히 서서 가족들과 소회도 풀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아빠가 그렇게 원하던 학사모도 쓰고 사진 서로 찍었으면
얼마나 뿌듯해 하셨을까.
그냥 졸업식 끝나고 바로 가족끼리 모여
근처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했던 그날이 떠오른 것이다.
지금에사 이런 얘기 하는 거 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세상에는 잘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학사모가 부모님들께는 어떤 의미인지.
그런 것들을 얘기해보고 싶었다.
나는 이루지 못하여 원통하고 후회되지만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은 부모님께 꼭 학사모 씌워드리길 바라면서.
자, 그럼 이제 방법은 하나네.
박사나 석사모를 씌워 드리는 거.
와우 뽀야 갈길이 너무 멀다.
게다가 더 부모님을 고생시키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쪼골쪼골 말라가는 뽀야가 예상된다.
인생 굴러가는 방향은 내가 발딛고 서있는 여기에서부터 360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하자.
그 녀석이 분명 멋진 석사모, 박사모를 엄마께 씌워드릴 수 있을 것.
아빠, 졸업식때 정신없어서 말 못했는데
뽀야가 무사히 졸업하고 상받고 하게 된 것은 다
아빠 엄마 덕분이예요.
잘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사고 치지 않고 인생 잘 다져서
누가 봐도 멋지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 볼게요.
그 길에 아빠는 없는 거라고 그러지 말고
항상 우리랑 함께 하시기예요...?!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시던 술 한잔 따라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이제는 원하면 언제라도 따를 수 있지만
그 자리에 아빠는 계시질 않네요.
모든게 너무 늦어버렸어요.
아빠 어떡하죠.
시간을 되감고 싶어요.
철없고 바보 같았던 졸업식 날로
한번만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 땐 꼭 학사모 씌워드릴 수 있는 뽀야가 될게요.
[눈물이 툭 떨어진다]
BGM - 마마무, 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