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위한 꼼지락
생전에 과일을 너무나 좋아하신 우리 아부지.
제사상에는 홀수 갯수의 음식을 올려야 하므로.
5가지 과일을 준비해 보았다.
모든 제수 용품이 사진에 다 담기지는 않았지만.
사과, 배, 수박, 망고, 참외. 이렇게 과일 잔치를 벌였다.
아빠는 계실 때 식후에 참외 2-3개씩을 깎아 드시곤 하셨다.
그 옆에 앉아있으면 꼭 한 두개씩 내 입으로 들어왔었지.
과일 깎기의 달인이셨지.
그래도 아빠께서는 돌아가시기 한 1-2년 쯤에
맛있는 거 좋은 거 많이 드셨기에.
비록 쓰러지시고 아프게 되면서 섭식이 위태로웠어도.
저장해놓은 게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우리는 우리 편한대로
생각하곤 했었다.
아빠의 배가 홀쭉해지는 모습 같은 거 영영 안봤으면 싶었는데.
아빠 병상에 누워계시던 그 시기에 우리는 정말 힘들었다.
하루하루 사는 게 아니라 말라 비틀어지는 심정이었지.
그래도 겉으로는 항상 웃고 다녔던 것 같다.
슬픔이 짙게 배어있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지만.
다들 우릴 걱정하고 계셨기에.
애써 태연한 척. 씩씩한 척을 했었지.
그런 내가 무너졌던 것이.
아빠께서 자주 가시던 집 앞에 이발관 지날 때.
현대화 된 가게라서 이발관이라기보다는 미용실에 가까운데.
그 가게를 지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이제 다시는 못 오실 거라서 그럤는지.
아빠께서 이발 마칠 때마다 환하게 웃어보이며,
잘 됐는지 봐달라고 애교를 부리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서 더욱.
가슴이 후벼파지는 듯이 서걱댔었는데.
이제 나도 많이 무뎌진 걸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저기 저 심연속으로 가라앉아 봉인된 슬픔과 미련 조각들이.
나홀로 남겨진 순간이면 따끔따끔 나를 괴롭힌다.
잡생각 해 봤자 자기 고문에 가깝다.
나는 현명한 지성인이니까.
나름대로 감정도 사건도 잘 조절할 수 있을 거다.
잘 안되면 그냥 드러내고 엉엉 울어버리지 뭐.
제기를 닦으면서.
이런 일을 내게 시키다니 아빠 너무 매정하십니다...
라고 생각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깨끗한 행주로 제기를 닦는 건.
아빠 계실 때 외할머니 제사 때나 하던 그런 일이잖아요.
아빠를 위해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에요.
가엾은 사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매번 말로만.
아니 초창기에는 대화도 잘 나누지 않는
삭막한 딸이었다.
사춘기가 너무 늦게 찾아와서 아빠랑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짧아졌다.
[있을 때 잘 해] 라시던 아빠의 말씀의 깊이를.
그 땐 왜 몰랐을까.
너무도 어리고 어렸던 지난 날의 나를,
그저 감싸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시던 아빠의 모습.
항상 건강을 우선 하셨었고 주변사람을 살뜰히 챙기시던 아빠가.
왜 본인 몸 하나를 못 지켜서 이렇게 된 것인가는.
의문으로 남겠지만.
이제 이 일을 NN년 반복하다 보면
상처딱지가 자리잡을까?
닿기만 해도 쓰라리고 아픈 상처에 새살이 돋아날까?
그러기 어렵다면 내가 인간 0데카솔이나 후시0이라도 되어.
아빠의 상처자리에 가 닿고 싶다.
하산하시다가 문득 아빠 생각이 나서
전화를 주셨다던 그 살가운 말씀에.
아빠가 내려오셔서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굉장히 쓸쓸했을 수도 있을 첫 제사를
시끌벅적하게,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아빠 영정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정말 크다.
이래서 친지와 가족의 힘은 엄청나다고 하는 거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아빠는 원래 말이 많으셨어서.
이것 저것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으실까.
아마도 크게 요약해 보면.
뽀야 건강 잘 챙기고.
동생 네가 누나니까 잘 돌보고.
엄마 잘 살펴라.
그런 말씀 하실 것 같다.
걱정 마세요.
일단, 우리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따뜻하게 정말 괜찮게 잘 버텨낼 테니까요.
가끔 울적해지는 엄마는 아직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빠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그저 편히 쉬세요.
그렇게 매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