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문득 엄마와 TV를 보고 있는데
어떤 광고가 나오는 것이었다.
강아지가 너무 편안하게 잠들락 말락
하고 있는 귀여운 영상.
조금 찾아보니 LH 안단테 라는 아파트 광고 영상이었다.
광고 속에 조정석 배우가 나와서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강아지 사진 하나 때문에 아파트 광고 영상을 찾아 보다니.
하지만 너무 귀엽지 않은가?!
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고양이 발바닥, 배 드러낸 강아지, 막 빨래한 이불,
세탁기에서 갓 꺼낸 세탁물 냄새 등등......
요즘같이 볕이 좋은 날엔(얼마전까진 비 왔잖아!!! 세상에나)
해바라기를 하고 싶다.
우리집 해바라기는 이제 먼길을 떠날 것 같긴 하지만.
생육환경을 너무 급작스럽게 변화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냥 조그만 화분에 놔두고 길러볼 걸 하는 후회가.
식물의 동의를 얻는 다는 게 불가능 하니까.
'물 이정도면 되겠니?'
'화분 좀 볕드는 방향으로 돌려 줄까?'
'가지를 쳐도 될까나?'
뭐 어느것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고
식물은 오늘도 푸릇푸릇할뿐이다.
미루어 짐작하고 헤아림.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가 아기를 키워낼 때에도
아기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구간에서
어떻게 잘 알아챌 것인지.
친구 사이에서 말 없이도 어떻게 상대방의 니즈를
착착 맞춰나갈 것인지.
우리는 담벼락에 붙들린 담쟁이 덩굴같다.
벽을 향해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
담장이 너무 묵묵하고 차가워서 버리고 떠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그 차가운 담벼락에 엉겨붙어 목숨을 애걸한다.
하지만 담장이 늘 차가운 것만은 아니다.
담벼락 틈을 비집고 들어가 꽃피우게끔하는 희생.
자기 살을 내어주는 거룩한 마음.
조금 귀찮지만 나를 얽어매도록 허락하는
넓은 그릇.
어째, 뽀야를 길러낸 엄마의 마음 같다.
대답없는 늦은 사춘기의 벽을 앞에 두고
우리 엄마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었던 걸까.
벽을 부숴버리지 않고
손에 쥐어진 연장을 내려놓고
그저 감싸 안아주셨던 것은 아닐까.
벗어나지 못하도록 꽁꽁 얽어 매서
느끼고 싶지 않은 그 온기라도 느끼라고.
온 몸으로 외치며 그자리에 묵묵하게
서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뜨거운 눈물이 고인 자리 근처에는
동네 강아지들이 모여와 놀고 있을 것만 같다.
예전에는 똥개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똥고양이들이 동네에 많아진 것 같다.
어느 아파트 단지를 가 보아도
고양이가 훨씬 많다.
물론 사육당하는 강아지들은 무지 많지만
야생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그런 들고양이들이
참 많아진 것 같다.
고양이를 미워할 수 없는 이기적인 이유가 있다.
쥐를 퇴치하는 데 그만이라는 것.
얼핏 기억나는 것이.
옛날 옛날 먼 옛날에
아마도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는 고양이를
악마의 하수인이다. 불길하다 하여
많이도 죽였다고 하는데
그리고 나서 역병이 번져서
아마도 흑사병이었던 것 같다.
유럽인들이 많은 희생을 입었다고.
내가 보기 싫다고
내가 꺼림칙하다고
먹이사슬의 어딘가 쯤에 위치하는 생명을
함부로 판단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고 어디까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우리집 고양이야'
하는 말이
'우리집 암모나이트야, 지금은 화석 속에 굳어있어서 좀 갑갑해 하는데 귀엽지 않니?'
로 바뀌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너그러워 지고 싶다.
항상 나에게 없는 능력을 갖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다.
부족하니까, 더 채우고 싶은 마음.
맞바람이 치게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는 데
지금 이 풍경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이 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간다.
우리집 바로 앞은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고
현재 공사중이다.
놀이터 하나 끼고 바로 공사를 하는 터에
소음, 분진, 온갖 유해 물질들이 비산되어
창문 열기도 꺼림칙 하다.
그래도.
나는 파란 하늘이 더 보고 싶다.
이제 아파트 건물이 올라가면
이 풍경은 온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된다.
많이 봐 두자.
개발인지 환경인지
무얼 우선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에 무게를 더 두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각자의 주장이 너무나 또렷해서
굽히고 들어갈 구석이 없다.
오늘도 부지 위에 들어선 타워크레인은
두팔을 쫙 뻗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가 너의 위에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더 높이 더 높이 목을 뻗는다.
내가 보기엔 흉물이지만
누군가가 보기엔 사랑스런 보금자리를 위한 거겠지.
한 두개가 아닌 타워 크레인 사이에서
날씨 좋다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운동하고 있자니
마치 판옵티콘에서 사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곳은 원형 감옥.
익명이라는 옷을 입은 누군가가
항상 나를 감시한다.
어이, 정신차려!
여기는 뽀야 네가 살고 있는 소중한 집이야!
그런데 저 아저씨들이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단 말이지.
광고 속 강아지를 보며.
아파트를 짓는다는 것이 그리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뽀야는 개발 보다는 환경쪽에
더 많이 기울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부지에는 원래 무도 심었었고 푸릇푸릇한 것들이
가득 했고 수확의 기쁨이 있었다.
그렇게 연명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나 보다.
땅을 팔아버리고 그렇게 수용되고
무서운 콘크리트 건물이 나를 째려보게 되다니.
그렇게 조금씩 뭔가가 무너져가고 있다.
아무리 인공적으로 공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그런다고 해서
원래 아름다웠던 그 풀숲이 돌아올 수 있는가?
온갖 들풀들이 난리도 아니었던
어쩌면 이제는 개구리 소리, 귀뚜라미 소리, 새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휘날리는 지폐를 뒤로 하고
빗물하나 빠져나갈 구멍 없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그저 웃을 수 있는가?